[소통의 시 편지]헌책방에서-이운진
[소통의 시 편지]헌책방에서-이운진
  • 박제영
  • 승인 2019.11.12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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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은 날
빈 가방을 들고 헌책방에 간다

한때는
누군가를 오싹하게 하거나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던 책들을
허락된 목격자처럼 살펴보다가

그가 다가온다...
2003. 사강 새롭게 느낀다
네가 선물한 책을 혼자 읽었다. 원

이 짧은 문장을 책 속에 남기고 떠나보낸 이들은 누구일까
궁금해한다

분명 등을 돌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낡은 책 속에서
흰빛을 잃도록 잠든 꽃잎
납작하게 눌린 파리를 보는 것보다
더 놀란 마음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큰비 뒤에 읽을 인생과
자오선 아래 까만 밤을 지켜줄 그림들

너무 세게 껴안으면 안 되는 새끼고양이를 안듯
새로 산 헌책을 안고

가방 속 책들의 무게만큼
낙관주의자가 되어 보기로
아직은 사람을 사랑해보기로
햇볕 속에서 혼자 곰곰해진다

-『월간 춤』, 2019년 10월호 권두시-

*주말 이틀 동안 춘천에서 강릉에서 너무 세게 술을 먹은 탓에 아직도 숙취가 덜 깼는데요... 지난 달에 책갈피를 접어두었던 시를 다시 펼쳐 읽습니다. 숙취 속에서 이운진의 시 「헌책방에서」를 읽습니다.

새 책이 헌책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애증의 문제일까요? 누군가에게 파양된 헌책이 누군가에게 다시 입양되기까지 그 구구하고 절절한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

"분명 등을 돌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며 "아직은 사람을 사랑해보기로 / 햇볕 속에서 혼자 곰곰해진다"라는 시인의 마음에 잠깐 다가가보는, 숙취 속에서 혼자 곰곰해지는 아침입니다.

"낡은 책 속에서 / 흰빛을 잃도록 잠든 꽃잎 / 납작하게 눌린 파리"가 실은 나의 모습은 아닌지. 나 또한 누군가의 책 속에서 그렇게 잠든 채, 눌린 채 낡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파양과 입양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파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곰곰해지는 아침입니다. 숙취 탓이겠지요.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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