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꽃무릇-박제영
[소통의 시 편지]꽃무릇-박제영
  • 박제영
  • 승인 2019.09.3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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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꽃구경 가요

잎 지면 잎 진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채로 오늘은 잎 없이 붉은 꽃 피고
꽃 지면 꽃 진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채로 내일은 꽃 없이 푸른 잎 돋네
 
백년해로 구억만리가 구비구비 고빗길이구나, 천야만야 벼랑길이구나
그립다 서럽다, 천근만근 녹슨 쇳덩일랑 어여 내려놓아라

고빗길 구비치거든 따로 또 같이 구비쳐 오르고, 벼랑길 휘돌거든 함께 또 홀로 휘돌아 가라
백년해로 가는 걸음, 엇박 걸음이 정박 걸음이다
피고 지고 오르고 내리고 구비치고 휘돌고, 따로같이 함께홀로 엇박자로 흘러라

도솔천 그늘 속이 花륵화르륵 화르르륵
붉디붉은 꽃미륵부처들로 야단법석이로세

선운사 오르다 간밤의 다툼일랑 까마득히 잊었어라
花르르 사르르 꽃으로 풀렸어라

여보 꽃구경 가자


- 『식구』(북인)-

 

*9월의 마지막 날 아침, 언젠가 한 번 시편지로 띄운 적이 있는데, 다시 띄웁니다. 가을이니까요. 꽃무릇이 꽃미륵인 줄 아직 몰랐던 때, 부부로 산다는 게 어쩌면 꽃무릇처럼 사는 거 아니겠냐고. 만날 수 없는 둘이 한 뿌리로 만나 엮여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함께/홀로 어울렁 더울렁 사는 거라고. 그렇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는 거 아니겠냐고.

졸시 「꽃무릇」은 그렇게 선운사 꽃무릇이, 꽃미륵이, 꽃부처가 불러준 대로 옮겨 적은 것이지요.

가을이 가기 전에, 꽃무릇이 다 지기 전에 영광의 불갑사든, 함평의 용천사든, 고창의 선운사든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절집 가는 길 지천에 핀 꽃무릇 보시면 꽃미륵을 만났거니 합장 한 번 하시고 그 아련한 사연과 정취에 흠뻑 젖었다 오시면 좋겠습니다.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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