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책은 계륵이다
[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책은 계륵이다
  • 정영희
  • 승인 2019.09.1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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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현(1961~)은 ‘책은 도끼다(2011년)’, 라는 책을 냈다. 박웅현은 광고인이자 이 시대의 인문학자이다. 인문학이란 자연과학이 자연현상을 다루는데 반하여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인문학자다. 그 책은 그만의 독법(讀法)으로 읽은 책을 소개한 강의록이다. 책은 도끼다, 라는 말은 물론 그의 문장은 아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그 책을 읽는단 말인가. 책이란 우리 안의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

카프카가 1904년 ‘변신’, 저자의 말에 쓴 문장이다.

​‘책은 계륵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계륵(鷄肋)이란 ‘닭의 갈비’로 먹을 거는 없고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이다. 계륵이란 말은 삼국지에서 유래 되었다. 조조가 유비와 한중을 놓고 다투는 중 진격하자니 불리하고, 퇴각하자니 천하통일을 위해선 아까운, 난감한 상황을 계륵이라는 암호에 심정을 담았다. 말하자면 한중은 조조에게 ‘계륵’ 같은 존재였다.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시집갈 때부터 치면 이번이 딱 12번째 둥지를 옮긴다. 10개월 살고 옮긴 적도 있다. 이집에서는 14년 쯤 살았으니 꽤 오래 살은 편이다. 서민들은 한 평생 살며 이런저런 이유로 대충 12번 쯤 이사를 하며 살 것 같다. 야심한 밤, ‘페북질(Facebook을 하다)’을 하던 시간에 이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사 준비라는 게 별거 없다. 버리는 거다.

​눈에 보이는 대로 책상 위의 작은 스피커부터 버렸다.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해 한 동안 새벽 6시에 인터넷으로 영어 공부를 할 때 사용한 스피커다. 영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세상은 영어를 하는 사람과 영어를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나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 편에 서야 한다. 그래도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으니, 말보다는 독해가 낫다. 생활영어 정도는 문장을 보면 대충 안다. 그러나 말은 꿀 먹은 벙어리 수준이다. 외국인만 보면 무섭다. 괜히 내게 길을 물으면 어떡하지, 하고.

​중학교 때는 제법 영어 공부를 잘해 만점을 받아 일어서서 박수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깊은 사춘기를 만나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영어고, 공부고 다 놓쳐버렸다. 그렇다고 특출나게 대단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보다 정신생활이 조금 풍부해진 정도랄까.

​먹은 문자가 많으니, 쓸데없이 배설하게 되어, 긴 글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수준이랄까. 아무튼 영어 공부를 하던 스피커를 버리고 물티슈로 그 스피커가 앉아 있던 자리주변의 먼지를 닦았다. 책상이 한결 깨끗해졌다.

​다음은 화장대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주로 내게 맞지 않는, 선물 받은 화장품들이다. 선물로 받았으니 금세 버리지도 못하고 한참을 가지고 있다 보니, 남에게 주는 시기도 놓친 것들이다. 선물을 줄 때는 주의해야한다. 선물이 곧바로 쓰레기로 변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선물을 준 이를 기억하게 한 것만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커다란 재활용 플라스틱 바구니에 버리기 시작하자 금세 그득해졌다. 다음 날 밤은 장롱 한 칸씩을 정리하며 버렸다. 버리기 시작하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묵은 때를 벗겨내듯 개운했다. 아, 진즉에 버릴걸. 둘러보니 모두 버리고 갈 것들밖에 없다. 죽을 때 말이다. 그림도 얼마나 많은지. 세계여행을 돌아다니며 사온 아프리카 조각이나 기념품도 다 버릴 것들이다. 더 이상 그림이나 기념품은 한 점도 더 추가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피카소의 그림이나 조각일지라도.

​세상에, 난 그 동안 책만 보고 글만 쓰고 산 줄 알았더니, 온통 쓰레기들만 사다 모은 것이다. 신발은 왜 이렇게 많은가. 옷은 또한 말해 무엇 하리. 죽을 때까지 입고 신어도 남을 것 같다. 더 이상 옷과 신발을 사는 행위는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부엌 찬장의 그릇들은 또 어떻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다보니 그릇 욕심도 많았다. 요리는 번뇌를 잊게 한다. 요리를 할 때는 잡생각이 없다. 나를 위해서도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은 즐겁다. 음식의 완성은 그릇에 있다.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음식의 품격이 달라진다. 특히 하얀 백자기 그릇을 좋아했다.

​이십여 년 전, 접시에 엷은 하늘색으로 매화 꽃잎을 몇 점 그려 넣은 커다란 백자기 접시를 본 후 잠을 설치기도 했다.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쯤 인사동을 갔을 때 그 주인이 한 개 값으로 두 개를 줄 테니 가져가라고 했다. 난 너무나 기뻤다. 그 접시도 이젠 무거워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리지는 못하겠다. 이렇다니까.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30년은 더 살 거 같다. 부모님에 비춰봐서 말이다. 아아, 나머지 삶은 심플하게 살고 싶다. 법문(法門) 가슴에 품고, 가사장삼 하나에 발우 하나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게 책이다. 오피스텔에도 몇 천권은 될 책이 있지만, 집에도 책이 많다. 오피스텔에서 불어나는 책을 집으로 옮기다 보니, 어느 새 집에 또 책이 수 백 권 쌓였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버리고 싶다.

​한 때는 뜨거운 가슴으로 밤 새 보던 책들을 두 번 다시 꺼내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필요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찾게 된다. 철지난 잡지도 잘 버리지 못한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저 잡지를 만드는 편집인들의 피땀을 생각하면 버릴 수가 없다. 신문의 생명은 하루고, 월간지의 생명은 한 달이고, 계간지의 생명은 삼 개월인 줄 안다. 그렇다면 시간의 검증을 거친 명작들이 아닌 현재 살아 있는 작가들의 장편소설과 작품집의 생명은?

​잡지들을 골라 버리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나와 일면식은 없지만 작가회의나 문인협회의 주소 수첩을 보고 보내온 책들을 버린다. 싸인 한 첫 장은 찢은 후 버린다. 내 책도 이렇게 버려질 것이다. 그러니 일면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책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라고 중얼거리며 버린다.

​내가 선택해서 산 책들은 버리지 못한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 책은 못 버린다. 문단생활 30여 년 동안, 창작이랍시고 출간한 열 권 가까이 되는 책들이 모두 쓰레기들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울적해진다.

​소설 ‘25시’를 쓴 게오르규는 작가는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기계장치가 발달되기 전, 잠수함에 토끼를 승선시켰다고 한다. 잠수함 속 공기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토끼가 견디지 못하면, 사람들은 다 죽게 된다는 신호다.

​며칠 사이를 두고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와 퍼포먼스 예술가 부부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가장 가난한 예술가가 견디지 못하면 보통 사람들은 더욱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다. 별안간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소설가는 세상의 산소를 측정하는 존재들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심호흡을 한다.

​과감하게 버린다고 버렸는데도 책은 여전히 많다. 더 버릴까 둘러본다. 버리자니 아깝고 가져있자니 두 번 다시 펼쳐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이다. 책은 계륵이다. 대략난감한 이런 상황을 조조는 어찌 계륵에 비유했을까. 책은 계륵이고, 조조는 조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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