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정윤천
[소통의 시 편지]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정윤천
  • 박제영
  • 승인 2019.08.12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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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소리가 생겨난 뒤에야 기타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낙엽이 떨어지고 난 뒤에서야 벤치들은 태어나고 그 벤치에 걸터앉아 기타 소리를 쓰다듬었던 그가 가을 속으로 떨어질 때 당신의 손수건 한 장이 나뭇잎에 덮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발해로 가는 저녁』(달을쏘다, 2019)

*정윤천 시인의 신작 시집(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에서 한 편 띄웁니다. 시를 읽기에 앞서 먼저 1956년 명동 뒷골목,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했던 막걸릿집 <은성>에서 박인환이 쓰고,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흥얼거렸던 노래, 세월이 좀 더 흘러 박인희가 불러 유명해진 노래의 「세월이 가면」을 먼저 읽어봐야겠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취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다 읽으셨으면 정윤천 시인의 시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를 다시 읽어보시지요. 어떤가요? 선배 시인 박인환에 대한 오마주일까요? 아니면 패러디일까요? 실은 우문이지요. 질문이 틀렸네요.

그보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먼저 시의 첫 문장을 보세요.

"기타 소리가 생겨난 뒤에야 기타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다"

30년 전 당신(의 몸)은 정말로 젊고 날씬했지요. 그런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고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생겨났지요. 30년이 지난 당신(의 몸)은 조금은 늙고 조금은 뚱뚱해졌는데, 내 눈에는 여전히 당신이 예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는 시의 문장을 이렇게 바꾸는 겁니다.

"사랑이 생겨난 뒤에야 당신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라고 말입니다. 부부가 백년해로한다는 일은 결국 추상('사랑')이 구상(늙어가는 몸)을 이끌고 가는 것이니, 세월이 가면 모든 구상이 추상으로 변하는 것이 또한 자연의 이치이니,

그러고 보면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은 일인가 봅니다. 『발해로 가는 저녁』을 다 읽을 때쯤이면 이 폭염도 가라앉겠지요.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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