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명리학, 당신의 거울
[소설가 정영희의 산문노트]명리학, 당신의 거울
  • 정영희
  • 승인 2019.07.2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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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델포이 신전 벽에 적혀 있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나 자신’을 몰라 수많은 시행착오로 시간낭비, 돈 낭비, 사랑낭비, 감정낭비, 인간관계 낭비 하물며 자식의 인생까지 낭비 시킨다. 예술가나 연예인이나 딴따라 사주인데 법학을 시킨다. 완벽한 문과 성향인데 이공계로 가게 한다. 뿐이겠는가, 그러다 잘못하면 자식이 완벽하게 부모를 배신할 수도 있다. 그 모든 게 자식의 팔자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사랑과 물과 팔자는 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세상의 어떤 배신도 자식이 죽음으로 부모의 등에 칼을 꼽는 배신을 능가할 것은 없을 것이다. 일주일 사이로 유명인이 2명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직업의식은 못 속인다고, 그들의 운명(사주팔자)이 어떠했으며, 지금 어떤 대운과 어떤 해운과 어떤 날 운이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심지어 군에서 총기사고가 났다는 기사를 볼 때면 너무나 안타깝다. 손윗사람이나 친구 동료에게 왕따를 당하는 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주팔자를 타고 났다면, 운이 좋을 때 군 입대를 해야 괴롭힘이나 불의의 사고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사주에 관살(官殺)이 많으면 관재수(官災數 : 경찰서나 법원을 드나들게 되는 수)가 있을 수 있고, 더욱 운이 나쁘면 자진(自盡)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이런 운일 경우에는 부모가 밀착방어를 해서 사랑을 융단폭격으로 쏟아 부어야 된다. 그래도 팔자가 막아 질까 말까다. 그런데 이런 사주들은 대개 부모와 친구와 혹은 애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니 더욱 세상에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우울증이 될 수도 있다. 때론 ‘가면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해서 주변에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꼭 관살이 아니더라도 오행이 생년월일시 네 기둥(사주, 四柱)의 여덟 글자(팔자, 八字)에 골고루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너무 편중되어 있어도 건강과 불의의 사고를 주의해야 한다. 명리학은 통계학이다. 명쾌하다. 5.500년 동안 한문의 역사와 같이 발전되어온 학문이다. 5.500년 전 거북의 등껍질이 갈라진 걸 보고 농사 점을 쳤고, 상형문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삼국지를 보면 유비가 제갈공명을 만나러 가는 날도 거북점을 친다. 거북 네 마리가 다 똑같이 엎드린 모양으로 나오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당장 제갈공명을 만나러 가지고 한다. 정말 점괘대로 세 번째 제갈공명의 초당을 방문했을 때 제갈공명이 여행에서 돌아와 있다. 그게 그 유명한 ‘삼고초려’다.

​오래전 드라마 ‘이순신(김명인 분)’에도 점을 치는 장면이 나왔다. 늘 고요한 밤 홀로 앉아, 일기를 쓰던 이순신은 내일 전투가 어떨지 대나무 통에 꽂힌 나뭇가지를 뽑아본다. 육효(六爻 : 주역의 64괘를 구성하는 6개의 획)다. 그 때는 명리학에 관심도 없던 시절인데 그 장면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주역을 통탈했다. 나는 정약용의 후손이다. 야심한 밤 홀로 앉아 글을 쓰거나 남의 사주를 간명지에 풀고 있을 때면 다산의 피가 파랗게 내 속에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는 형님(정약전) 때문에 유배를 간다. 천주학당을 버리겠다고만 해도 될 일을 다산은 끝까지 형님을 배신하지 않았고, 하느님도 버리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는 다산은 왜 유배지에서 주역서를 묶은 끈이 다 닿도록 주역을 독파했을까.

​종교와 사주명리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주팔자는 그냥 태어날 때 이마에 찍고 태어나는 바코드와 같다. 이를 운명이라 하고, 신탁이라 하고, 하느님의 프로그램이라 하고, 과거생의 성적표라고도 한다. 다산은, 다만 하늘의 뜻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면 순명할 수가 있지 않는가. 감히 누가 신탁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그 따위 사주팔자 안 믿는다고 하는 자 만큼 교만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그런 사람을 나는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자가 신(神)의 화살을 맞는 것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무수히 봤기 때문이다.

​명리학은 거울과 같다. 나 자신을 알게 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면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 남편 잘못 만나 자신의 인생이 꼬였다고 항변하던 여자도 자신의 사주를 듣고는 숙연해진다. 다른 남자를 만났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 덕이 없는데 누굴 만난들 다를 수 없다.

​그러나 변수는 있다. 세상에 나쁜 부부는 없다. 안 맞는 부부만이 존재한다. 남자 덕이 없어 남편 덕을 못 본다고 해도 나와 궁합이 맞는 남자를 만나면 비록 덕은 못 본다하더라도 그런대로 잘 산다.

​명리학은 성패와 화복을 미리 알아서 패와 화를 피하기 위해 보는 게 아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을 알고, 운이 좋을 때와 운이 쉴 때를, 그런 때를, 기미를 알아차리는 학문이다. 가령 운이 쉴 때를 알면 가만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면 된다. 운이 쉴 때를 모르고 투자를 한다든가 새로운 일을 벌이면 실패 우려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은 돈과 성(性)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행으로 돌아간다. 돈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어도 행과 불행은 똑같다. 얼마나 공평한가. 돈 많다고 행복만 하다면 돈 없는 사람은 다 죽어야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은 운이 나쁠 때는 보통사람보다 더욱 나쁠 수 있다. 전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기도하는 이유다.

​그저 평범하게 부부금실 좋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옥황상제에게 비니까, 그런 인생이 있으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겠다고 한 유머도 있지 않은가. 물 좋고 정자 좋은 사주는 채 2%도 안 된다. 100명 중에 한 두 명만이 좋다는 말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100%란 있을 수 없다. 80%로는 맞는다. 10%로는 노력이 필요하고, 나머지 10%로는 종교의 힘, 즉 기도나 수행으로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참회하여 성숙된 영혼으로 거듭나거나, 죽을 각오로 과거 생의 습(習)을 잘라버리는 수밖에 없다. 다음 생에는 이런 팔자로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아니면 공덕을 많이 쌓아 나쁜 팔자의 빚을 탕감할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왜 단명했는가에 대해 언젠가 ‘정영희의 역학산책’이란 칼럼에 쓴 적이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적선을 많이 한 데 비해, 스티브 잡스는 평생 베풀지 않았다. 자선단체를 만들어 놓고도 나중에 취소했다. 그는 참선도하며 살았지만 적선으로 자신의 명줄을 이을 수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운명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참회기도(수행)와 적선(방생)뿐이다. 우리나라 재벌들도 눈 여겨 보면 자선사업을 많이 하는 기업이 잘 풀린다. 악덕기업이 잘 된다면, 우리가 오래오래 살아 그 다음 세대가 잘 사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렇게 유쾌하고, 명쾌하고, 담백한 명리학을 터부시하고, 백안시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오만하게 구는 ‘근본주의’자들이 많다. 근본주의자들은 언제나 위험하다. 신의 이름으로 엄청난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이 모두 ‘근본주의자’들 아닌가. 그들은 자신의 종교 이외는 모두 악령으로 본다.

​명리학은 당신의 거울이다.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머리를 빗듯, 명리학은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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