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토마토가 익을 동안-박지영
[소통의 시 편지]토마토가 익을 동안-박지영
  • 박제영
  • 승인 2019.07.15 1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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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토마토가 배달되었다

밤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흔들어 깨우듯
어미의 유전인자가 자식에게 대물림되듯이
집요하게 온다

나는 밤에 태어나 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랐다
나를 먹이고 키운 밤
그렇게 나를 어둠에 심어놓은 밤
그렇다고 밤을 엄마라 불러야 하나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밤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어떤 영혼은 별빛을 가지고 있어
영혼의 갈피에 그 별빛을 끼워 넣으면
서로 부딪혀 방울 소리를 낸다

나는 별의 말을 번역하는 자
밤의 말을 전하는 자

또 하나의 밤이 익어가는 순간
토마토가 익을 동안
침묵하기로 하자

-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시인동네, 2019)-

*박지영 시인의 신작 시집,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순간들』에서 한 편 띄웁니다. 요즘 제가 매일 밤 자기 전에 간식으로 먹고 있는 과일이 바로 참외랑 방울토마토입니다. 배가 조금 든든해야 잠이 오거든요. 저로서는 일종의 수면제인 셈입니다만, 암튼 그래서 오늘 아침 문득 떠오른 시가 바로 박지영 시인의 「토마토가 익을 동안」이라는 시입니다.

계몽이라는 말이 있지요. 영어로는 enlightenment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빛'이 곧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믿음이 소위 '근대적 이성주의'일 텐데요. 이런 빛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오히려 시력을 잃어버린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빛이 선이고 이성여,어둠이 악이고 야만이라는 이분법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빛이 빚어낸 상처들이 도처에 가득하지 않은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토마토가 익을 동안'이 보여주네요.

우리는 빛의 자식이 아니라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생각. 우리는 빛의 존재가 아니라 열(熱)의 존재라는 생각. 토마토가 익을 동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어둠이 빚어낸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열의 존재인 우리는 너무 오래동안 어둠을 잃고 지낸 우리는...토마토가 익을 동안이라도 잠시 침묵해야겠습니다.

별과 밤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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