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모과 두 알-이운진
[소통의 시 편지]모과 두 알-이운진
  • 박제영
  • 승인 2019.05.20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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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위해 책장 위에 올려 둔 모과 두 알이 썩고 있다


하나는 살이 부풀어 오르며 진물이 흐르고

하나는 속을 말리며 쪼그라든다


하나는 우는 여자 같고

하나는 참는 여자 같다


짐짓 모른 척해 주려고 모과를 책장의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놓고

어둠의 요람에서 자랐을 것들을 생각한다


씨앗과 달콤한 과즙, 풀과 별들의 냄새 같은 것이

다시 모과의 시간 바깥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바람도 매일의 상처였던 날들을 잊고 있을까


그사이

우는 여자는 어제보다 더 무너져 울고 있고

참는 여자는 어제보다 더 가벼워져 있다


하나는 슬프게 행복을 애원하는 것 같고

하나는 슬픈 눈으로 행복을 말하는 것 같아서


모과 곁에서

모과를 조금 떼어 놓는다


눈물보다 어리석은 여자가 내겐 더 옳았으므로

정말 잊어진 것은 끝내 잊어져야 하므로


나는 참고 있는 모과 쪽으로 자꾸 햇살을 모아 준다


-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천년의시작, 2015)

 

이운진 시인의 시집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에서 한 편 띄웁니다. 「모과 두 알」이라는 시인데요, 저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는 모과가 몇 알이 있을까요?

지금 당신의 집에서 썩고 있는 모과는 몇 알인가요?

 

처음 집에 들였을 때만해도

모과 향기가 집 안 가득했을 테지요.


모과의 살이 부풀어 오르며 진물이 흐르기 전까지는

모과의 속이 마르며 쪼그라들기 전까지는

 

달콤한 향기에 취하기도 했을 테지요

 

모과와 모과가 모여서 서로를 썩게 만들 줄은

모과와 모과가 모과를 만들며 서로를 울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더랬지요.


당신의 집에도 혹시

우는 여자가 어제보다 더 무너져 울고 있지는 않나요?

참는 여자가 어제보다 더 가벼워져 울고 있지는 않나요?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을까요?

우리집 모과들은 어떻냐고요? 쉿 비밀입니다....^^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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