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희망비디오-김재룡
[소통의 시 편지]희망비디오-김재룡
  • 박제영
  • 승인 2019.05.13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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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빌려드립니다.
희망비디오 가게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빌려가지 않은
희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면목동 전세방에서
전세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난 리을이네 식구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지금은 인천하고도
저 주안사거리 쪽에서
보험사 융자를 얻어 비디오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천오백원이나
이천 원씩 받고 비디오를 빌려주는 희망비디오 가겝니다.

리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디오 게임을 합니다.
아직 게임을 할 줄 모르는 새하가 블록 쌓기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둘 빌려간 희망들을
다시 되돌려주기 위해 들렸다,
방울 소리 울리는 가게 문을 열고는 또 다른 희망을 찾아
집으로 거리로 나서겠지요.

새 봄이 오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바뀌고 날이 날마다 바뀌는데
사람들의 희망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빌려간 희망만을 사람들은 다시 빌려가거든요.
간혹 다른 사람들과 다른 희망들을 찾는 이도 있지만
역시 대박 프로가 안겨주는 희망이 가장 잘 팔립니다.
장사라는 게 돈 놓고 돈 먹기인 줄 알지만
희망마저도 희망 놓고 더 큰 희망 따먹기 하는 것 같아
빌려줄 희망들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한
리을이네 희망비디오 가게에는,
융자 받은 돈 이자만 쌓여가듯이
별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찾아옵니다.


2
아내의 희망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을 게다.
내가 출근을 하고 리을이도 학교에 가고 나면
청소를 끝낸 이른 아침의 가겟방엔
새 영화 포스터를 촘촘히 붙여놓은 유리창 사이로
화사한 햇살이 스며들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난로를 피우고
카세트에 맑은 음악이 흐르게 할 것이다.
둘째 놈이 늦잠을 깰 때쯤이면
뜨거운 차 한잔의 여유,
그 정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아내의 희망은
사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을 게다.
내 봉급 받아선 융잣돈 꺼나가고
이것저것 월부금이며 곗돈, 카드 결제를 하고
장사해서 번 돈으론
테이프값 주고 가겟세 주고도
밥이야 못 먹고 살겠냐는 것이었을 게다.


그렇게 아내의 희망은
사실,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을 게다.
한 이삼 년 고생을 하고 나면
최소한 남편 승용차 한 대는 사줄 수 있으리라
그런 정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나의 희망은
아내의 그렇게 크지 않은 희망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 후, 나의 희망은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아내의 잘 되지 않는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되었다.
아내의 그렇게 크지 않은 희망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희망이 되었다.


지금 나의 희망은
자꾸만 희망을 잃어가는 아내가,
우리가 산다는 것이
산다는 것의 소금밭을 뒹굴며
거듭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나의 희망은
우리의 희망이 어느 순간
절망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산다는 모습이란 걸
가능하면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 『개망초 연대기』(달아실, 2019 근간)

드디어 김재룡 시인의 첫 시집 『개망초 연대기』가 곧 나올 예정입니다. 나라를 망쳤다고 망초 망초 불렀다는, 그걸로도 분이 안 풀려 개망초 개망초 불렸다는 꽃. 개망초... 나라를 망친 꽃이 아니라 실은 고향을 잃은 꽃인데요... 하필이면 시인은 시집 제목에 개망초를 붙였을까요? 시집을 읽어보시면 아! 그렇구나 하실 텐데요...암튼 그 시집에서 아직 편집 중인 시집에서 한 편 띄웁니다.

「희망비디오」.

김재룡 시인의 첫째아이 이름이 '새하', 둘째아이 이름이 '리을'인데, 그러니까 이 시도 김재룡 시인의 실제 가족사입니다.

시가 워낙 길어서 제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듯.... 다만 시집을 편집하면서 들었던 생각 하나만 들려드리는 것으로 오늘의 시편지는 가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기까지, 어떤 간난신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는지, 조금은 알 듯 말 듯. 희망이 얼마나 많은 절망을 딛고 피는 꽃인지, 아주 조금은 알 듯 말 듯....

세상에 보기 드문 시집이 곧 여러분 곁을 찾아갈 예정이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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